'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의 마지막 행적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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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내일은 현충일입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최재형 선생에 대한 미공개 발굴 기록을 MBC가 최초로 확인했습니다.
독립운동 후원가로만 알려져 있던 최재형 선생이 직접 무장투쟁을 이끌면서 일제에 맞선 기록들인데요.
일제는 그를 '혁명군의 원조 주모자'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김민형 기자가 단독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하얼빈 의거' 직전 연해주에 머물던 안중근 의사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장비와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 최재형.
사업해서 번 돈을 연해주 일대에서 진행된 항일운동에 쏟아부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습니다.
[최파벨/최재형 손자(2019년)]
"연해주에서는 도로를 건설했고, 학교까지 설립했습니다. 독립운동 후원도 하셨고요."
그런데 후원자로 알려져온 최재형 선생이 생애 막바지, 직접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기록이 처음으로 발굴됐습니다.
1920년, 일본 경찰이 본국에 보낸 문서.
'최재형이 단장인 무력 독립운동 단체 독립단이 러시아군 총기 2백 정과 탄환 1만 발을 빼돌리려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단원 5명에게 맡겨 여차하면 강탈하고, 이후 수백 명을 동원해 중국 지린성으로 운반할 계획'이란 내용도 적혔습니다.
러시아와 가까운 중국 지린성의 항일운동을 지원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룡/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많은 무기를 구입해서 독립단에게 제공하고 그런 일을 직접 했다는 얘기죠. 무장 투쟁의 전면에 섰으니까."
일제에 총살된 것으로만 알려졌던 최 선생의 최후도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1920년 4월, 최 선생을 체포한 일제는 그를 '혁명군의 원조 주모자', '배일 조선인을 선동하고 우리 군을 저격했다'고 적었습니다.
이어 헌병분대가 청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최 선생 등이 빈틈을 노려 달아났다며 어쩔 수 없이 사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일제는 최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 그가 잠든 곳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문건에선 최 선생의 장남이 '최고려'라는 이름을 쓰며, 고려혁명군 1,200명을 이끌고 연해주에서 활약한 사실도 처음 확인됐습니다.
MBC뉴스 김민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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